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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드립 커피. 강석기 제공


최고의 커피콩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커피를 만드는 최고의 방법은 없다.
- 코비 쿰머, ‘The Joy of Coffee’

“저희가 새로 만드는 더치커피인데요. 맛 보고 평가 좀 해주세요.”

한 달 전쯤 우연히 들렀다, 이제는 출근도장을 찍다시피 하는 동네 카페가 있다. 이 곳은 원산지별로 10여종의 원두가 있어, 하나를 고르면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만들어준다. 평소 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필자로서는 아침에 마시는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이 소소한 즐거움을 주고 있다. 

매번 아메리카노의 두 배나 되고, 한끼 식사 값에 버금가는 핸드드립커피를 주문하니 카페에서는 필자를 커피마니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새로 들여온 원두라며 맛을 보라고 하더니, 얼마 전에는 더치커피까지 갖다 준다. 핸드드립 커피가 아메리카노보다 맛과 향이 좀 더 좋은 것 같다는 느낌을 갖는 수준인데, 커피에 조예가 깊은 사람처럼 비춰지는 것 같아 사실 뜨끔하다.

1999년 스타벅스 1호점이 이화여대 앞에 문을 연 이래 우리나라 카페 문화는 60, 70년대 경제개발을 능가하는 놀라운 속도로 자리잡고 있다. 필자도 2000년대 중반이 되서야 직장 근처 브랜드카페를 슬슬 드나들다 이제는 판에 박은 듯한 에스프레소 베이스 커피보다는 커피 마니아가 운영하는 듯 보이는 카페를 기웃거리고 있을 정도니까.

사실 핸드드립 커피가 아메리카노보다 ‘객관적으로’ 더 맛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두에 인용한 미국 저널리스트 쿰머가 표현한 것처럼 커피를 어떻게 만들어야 맛있는가는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의 문제다. 같은 원두를 써도 적용하는 방법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는게 커피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

●추출 방식이 맛과 향 결정

에스프레소의 생명은 갈색의 미세한 거품인 크레마로 고압 추출로 나온 단백질이 계면활성제 역할을 해 형성된다. 위키피디아 제공

 

오늘날 카페를 점령하고 있는 에스프레소는 곱게 분쇄한 원두를 고압의 뜨거운 물로 순간적으로 추출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원두 안의 지방과 단백질이 빠져나오면서 물과 뒤섞여 유화(emulsion) 상태가 되기 때문에 에스프레소는 약간 걸쭉한 아주 짙은 갈색의 액체로 보인다. 액체를 확대해보면 작은 기름방울이 무수히 떠 있는 상태다. 여기에 미세한 갈색 거품인 크레마(crema)가 덮여있다.

유럽인, 특히 이탈리아 사람들은 매일 아침 진한 풍미의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하루의 에너지를 얻는단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에스프레소를 베이스로 한 커피인 아메리카노와 카푸치노, 카페라테 등을 즐긴다. 필자도 경험삼아 에스프레소를 몇 번 시도해봤을 뿐 주로 마시는 것은 아메리카노다.

흥미롭게도 쿰머는 에스프레소를 다룬 6장에서 아메리카노 얘기는 꺼내지도 않는다.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 카페라테만 언급한다. 생각해보면 이탈리아 커피인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타 희석한 걸 왜 아메리카노라고 부르는지 이상하긴 하다. 알아보니 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 온 미군들이 에스프레소에 적응하지 못하고 물을 타 마시는 걸 보고 프랑스 사람들이 ‘카페 아메리카노’라고 불렀다고 한다.

미국 영화나 드리마에서 보면 미국 사람들은 가정이나 사무실에 커피메이커를 두고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것 같은데 이런 드립커피의 맛은 아메리카노와 꽤 다르다. 이런 커피는 대개 브랜드 카페에서는 ‘오늘의 커피’로 불린다.

요즘 필자가 빠져있는 핸드드립 커피는 커피메이커 대신 사람이 내리는 것이다. 드립커피의 노하우 역시 방대한 세계라서 똑같은 원두를 갖고도 누가 내렸는가에 따라 풍미에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깔때기 모양의 필터 위에 분쇄한 원두를 넣고 주둥이가 얇은 주전자로 뜨거운 물을 살살 부어내리는 핸드드립 방식은 커피향이 풍부하면서도 맛이 깔끔하다. 다만 이런 맛은 단점일 수도 있는데 종이 필터에 기름 성분이 걸러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나에게는 깔끔한 맛이 누군가에게는 빈약한 맛으로 느껴진다는 말이다. 

스타벅스 하워드 슐츠 회장이 한 인터뷰에서 ‘커피를 만드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해 화제가 된 프렌치프레스. 위키피디아 제공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회장은 수년 전 한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커피가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뜻밖에도 ‘프렌치프레스(French press)’로 우려내는 커피라고 답했다. 스타벅스 매장에서는 팔지 않는 방식인 프렌치프레스는 차를 우려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원두를 갈아서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저어주고 5분쯤 둔 뒤 아래 필터가 달린 플런저로 눌러 가루가 걸러진 커피를 얻는다. 

프렌치프레스 커피는 드립커피는 따라올 수 없는 풍부한 바디감이 있어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커피에 가루가 남아있어 거슬린다는 사람도 있다. 쿰머도 책에서 “필터 드립 애호가와 우려내는 방식 애호가 사이는 종종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아무튼 슐츠 회장이 ‘커피를 만드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했다니 한 번 맛보고는 싶다.

최근 커피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 더치커피는 차가운 물로 오랜 시간 천천히 커피를 추출하는 방법이다. 더치커피 기구를 보면(옆 사진) 화학실험실의 액체크로마토그라피 장치가 연상된다. 찬 물이 한 방울씩 분쇄한 원두가 가득 들어있는 유리통 안으로 떨어지면 물이 포화되면서 아래로 한 방울씩 떨어져 커피액이 얻어진다. 한번 추출에 보통 1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최근 커피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더치커피를 막 추출하기 시작한 장면. 찬 물이 한 방울씩 분쇄한 원두가 가득 들어있는 유리통 안으로 떨어지면 커피성분이 녹아들어간 물이 포화되면서 아래로 한 방울씩 떨어진다. 강석기 제공

 

더치커피는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맛이 나는데 향은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향기 성분은 대부분 물을 싫어하는 소수성이기 때문에 찬 물로는 원두의 향기 성분을 온전히 끌어오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랜 시간 동안 추출하므로 수용성 성분은 더 많이 빠져나올 것이다. 아무튼 이런 효과들이 합쳐져 드립커피나 에스프레소와는 전혀 다른 풍미의 커피가 얻어진다.

더치커피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카페인의 함량이 낮다는 것. 역시 차가운 물에는 카페인이 잘 안 녹기 때문이다. 문헌을 보면 카페인의 용해도는 상온(25도)에서 물 100밀리리터에 2.17그램인 반면 80도에서는 18그램이고 100도에는 67그램이나 된다. 참고로 드립커피가 카페인 함량이 가장 높다. 

●‘죽는 것을 잊은 섬’ 주민들이 마시는 커피는?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인스턴트커피가 주류여서였는지 커피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인식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하루 커피 두세 잔은 몸에 좋다는 얘기가 많이 들린다. 커피와 건강에 관한 연구논문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긍정적인 내용도 많지만 모순적인 결과도 많다. 커피 원두는 식물의 씨앗으로 그 안에 수백 가지 분자들이 들어있는데 여기에는 카페인 뿐 아니라 항산화 효과를 내는 물질을 비롯해 다양한 유효성분이 알려져 있다. 만일 커피가 수천 년 전부터 동아시아에서 알려졌다면 분명히 한약재로 쓰였을 것이다. 

학술지 ‘혈관의학’ 최근호에는 유럽의 장수촌인 그리스 이카리아섬(Ikaria) 주민들의 무병장수의 비결 가운데 하나가 커피를 마시는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죽는 것을 잊은 섬’이라고 불리는 이카리아섬의 주민들은 90세 이상 장수하는 비율이 1%로 유럽 평균인 0.1%의 10배에 이른다. 이카리아섬 주민들은 장수와 더불어 특히 심혈관계 질환이 다른 유럽인에 비해 적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연구자들은 66~91세인 이카리아섬 주민 142명을 대상으로 혈관의 안쪽 세포인 내피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지표인 ‘혈류매개 혈관확장반응’을 측정했다. 지혈대로 피의 흐름을 막았다가 풀었을 때 혈관내막의 이완성을 보는 방법으로 반응값이 클수록 혈관건강이 좋다는 뜻이다. 측정결과 커피를 많이 마시는 사람일수록 반응값도 크게 나왔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효과가 그리스식 커피를 마신 사람들에게만 나타났다는 것. 참여자 가운데 87%가 그리스식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그리스식 커피(Greek coffee)는 원두를 곱게 갈아 이브릭(ibrik)이라는 용기에 넣고 물을 붓고 저으면서 끓이다가 거품이 일어날 때 잔에 따러 가루를 가라앉힌 뒤 마시는 방식이다. 그리스식 커피는 맛과 향이 상당히 강하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쿰머는 책에서 이 커피의 이름을 부를 때 조심하라며 터키에서는 터키식 커피(Turkish coffee)라고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지중해 동부 여러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즐겨 마시는 타입이라는 말이다. 

연구자들은 그리스식 커피가 이처럼 혈관 건강에 좋은 건 원두의 유용한 성분이 다른 방식으로 만든 커피보다 훨씬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즉 그리스식 커피에는 항염증, 항산화 효과를 갖는 성분인 카페스톨과 카윌이 각각 100밀리리터에 0.3~6.7밀리그램, 0.1~7.1밀리그램 농도로 들어있는데 반해 드립커피에는 각각 0~0.1밀리그램만 들어있다고. 이 분자들은 덩치가 좀 크기 때문에 곱게 갈은 원두 가루가 뜨거운 물속에서 휘저어져야 어느 정도 녹아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식 커피를 파는 카페가 어디 없나. 찾아가서 한 번 맛보고 싶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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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Usmi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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